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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 3배 인공숲 만든 회장님… "200만그루 모두 자식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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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댓글 0건 조회 1,791회 작성일 17-07-09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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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강진에 '초당림' 조성한 김기운 백제약품 명예회장
1969년부터 가꾼 숲… 모두 600만그루 심었는데 산불·태풍·간벌 등으로
현재는 200만그루 자라 "초당림 꼼꼼히 다 보려면 차를 타도 사흘은 걸린다"

백제약품 창업주인 김기운 명예회장이 48년 동안 조성한 초당림에 기대어 쉬고 있다. 그는 올해 96세다. “사람은 언제든 나고 갑니다. 살아보니 대부분 부질없는 욕심이었습니다만, 초당림은 500년 넘게 지속되길 바랍니다.” 백제약품 창업주인 김기운 명예회장이 48년 동안 조성한 초당림에 기대어 쉬고 있다. 그는 올해 96세다. “사람은 언제든 나고 갑니다. 살아보니 대부분 부질없는 욕심이었습니다만, 초당림은 500년 넘게 지속되길 바랍니다.” /강진=김영근 기자
지난달 26일 전남 목포 기차역에 내려 택시를 타고 "초당림으로 가자"고 했다. 40분쯤 달렸을까, '초당림에 거의 다 왔냐'고 물었더니 택시기사는 "지금 눈앞에 보이는 산이 모두 초당림"이라고 했다. 초당림(草堂林)은 전남 강진군 명주리에 있는 인공 숲이다. 넓이가 960ha로 여의도의 3배가 넘는다. 개인이 소유한 인공림 중 국내 최대 규모다. 백제약품 김기운(96) 명예회장이 1969년부터 조성해 왔다.

이날 초당림 안에 있는 2층짜리 백제약품 연수원에서 김 명예회장을 만났다. 이날 새벽 서울 집에서 차를 타고 내려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인터뷰 전에 2시간 정도 지프차를 타고 숲을 둘러보자고 했다. 숲을 구경하는 동안 김 명예회장은 "초당림을 꼼꼼히 다 보려면 차를 타도 사흘은 걸린다"고 했다.

―차를 타고 산속 구석구석 볼 수 있게 해놓으셨네요.

"임도(林道)라고 합니다. 초당림은 경제림입니다. 가구 만들 때나 건축물 내장재로 쓸 수 있는 나무만 심었습니다. 이 나무를 베어 운반하려면 길이 필요합니다. 산불 났을 때 소방차도 다닐 수 있고요. 초당림의 임도 길이는 총 50㎞입니다. 흙길이라서 정기적으로 잡초를 없애야 하는데, 이 작업만 일주일 걸립니다."

―산림청에선 현재 초당림에 심은 원목 가치만 최소 270억원이라고 하더군요.

"지금까지 총 600만주를 심었는데, 산불, 태풍 피해, 간벌(솎아베기) 등으로 현재 약 200만주 자라고 있습니다. 시장에서 가장 경제성이 높다고 인정받는 편백나무 지역은 약 300ha입니다. 백합나무는 해외에서 들여와 대량으로 심었는데, 적응도 잘하고 다른 나무보다 빨리 자라서 산림청에 조림수종으로 추천해 채택됐습니다. 2006년부터 전국 산림에 백합나무가 심어지고 있는데 5300만주가 넘습니다."

김 명예회장은 나무, 조림과 관련된 숫자를 또렷이 기억했지만 목소리는 희미했고 대화는 중간 중간 끊겼다. 그는 2년 전부터 파킨슨병을 앓고 있다. 혼자서는 제대로 거동을 못한다. 이날도 앉고 설 때 부축을 받아야만 했다.

―몸이 편찮으셔서 인터뷰에 응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나무 심은 것에 대해서 궁금하다고 했으니까요. 그래서 응했습니다."

48년간 여의도 세 배 면적 숲 가꿔


김기운은 1921년 전남 무안군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보통학교(초등학교)만 나온 뒤 일본인이 경영하는 목포 한 상점에서 의약품 취급 일을 했다. 광복 후 1946년 8월 목포 남교동에 백제약방을 열고 의약품 도소매업을 시작했다. 그는 "온종일 약을 팔고 벌어들인 돈이 가마니로 몇 개씩 돼서 100장 한 묶음씩 약저울로 달아서 돈을 셌다"며 "섬 손님들이 가져온 돈에는 소금이 많이 묻어 있어 돈 무게가 더 나가는 바람에 따로 모아두기도 했다"고 했다. 회사는 서울 종로5가에 백제약국을 여는 등 전국 영업망을 가질 정도로 성장했다. 작년 백제약품 매출은 1조원이 넘는다. 그는 한창 회사가 커 나가던 1969년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왜 조림업에 뛰어들었습니까?

"5·16 이후 기업가도 나라를 위해 무언가 해야 한다는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특히 저는 광복이 없었더라면, 6·25 때 북한에 패했더라면 지금처럼 사업을 못 일으켰을 겁니다. 국가에 진 빚을 갚아야겠다고 생각하다 산에 나무를 심기로 했습니다. 당시 쓸 만한 큰 나무는 도벌(盜伐)로 모조리 잘리고 작은 나무는 연료용으로 수난을 당해 벌거벗은 산이 늘고 있었습니다."

―나무 심기가 잘됐습니까?

"처음에는 대실패였습니다. 나무에 대한 전문 지식이나 사업 계획 없이 그저 산에 나무를 많이 심고 사람들이 베어 가지 못하게만 하면 나무가 저절로 자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오산이었습니다. 매년 방충·방재 작업, 비료 주기와 풀 깎기 작업을 해야 하고, 최소한 3년에 한 번씩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마다 가지치기해야 하고, 임도 관리까지 해야 한다는 걸 전혀 몰랐습니다. 특히 제가 매입한 명주리 산은 민둥산이면서 또 돌산이었습니다. 돌을 캐내 구덩이를 파고 거기에 흙을 날라 채운 뒤 묘목을 심어야 했습니다. 회삿돈 거의 안 쓰고 자비로만 초당림을 가꾸려다 보니 부담이 많이 됐습니다. 초창기 나무 심는 데 하루에 동원한 인부만 500~600명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그가 초당림을 가꾸는 데만 약 150억원이 든 것으로 추산된다.

―주위에서 반대가 심했겠군요.

"품삯 받고 일하는 마을 사람들도 '이런 돌밭에 나무 심어서 무엇하냐'고 했습니다. '아까운 돈을 왜 이렇게 막 버리냐' '정신 나갔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가뭄과 추위에 전체 묘목의 50%가 죽었을 때도 있었습니다. 포기하고 싶었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왜 그만두지 않았습니까?

"내가 조림 전문가였거나, 엄청난 돈이 들어가고 많은 정성과 노력이 있어야 한다는 걸 미리 알았다면 겁먹고 손대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제 성격이 이렇습니다. 한번 손을 댄 것은 끝을 봐야 합니다. 사람이 일만 벌여 놓고 수습을 안 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김기운은 독학으로 임업과 인공조림을 공부했다. 일본에서 관련 서적을 대량 구입해 읽고 조림기구도 들여왔다. 그는 1972년부터 초당림을 조성하며 배우고 느낀 내용을 조목조목 기록했고, 이를 모아 2007년 '초당육림 40년' 책을 출간했다.

"아내·아들 세상 떴을 때도 숲에 왔다"

'오늘은 구정(설)이다. 실은 평균 월 2회 (초당림에) 입산하였는데 이번엔 그러질 못했다. 가인(아내)이 2월 4일 타계한 것이다. … 갑자기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죽은 이 한편 산 이 한편'이라는 딱한 처지가 되었다. 그러나 솔하에 수백명의 직원을 두고 방황할 수도 없어 다시 용기를 낼 수밖에 없었다. … (고향에 있는 아내 묘소 참배 후 초당림에 와서) 작업 사항과 자금 지출, 사업 계획을 검토하다. 1977년 2월 18일' (초당육림 40년 중 일부)

―4남1녀 중 셋째아들이 교통사고로 숨졌을 때도(1984년 2월) 장례를 마치고 초당림을 찾았더군요.

"그때 충격이 너무 커서 사흘간 잠을 한숨도 못 잤습니다. 그래서 수면제를 먹고 자야 했습니다."

―초당림에 오면 마음이 편해지는군요.

"울창한 숲속에 있으면 잠시 동안이라도 고민을 잊어버립니다. 지난 수십년간 고생한 기억이 사라지고 어린애처럼 행복할 때가 있습니다."

―초당림 나무를 종종 자식에 비유한다고 들었습니다.

"실제 자식이나 손자 같은 느낌이 듭니다. 예전에 가위하고 톱을 허리에 차고 나무 손질을 하러 가면 나무가 '고맙습니다' 나한테 절하는 것 같았습니다. 태풍이 몰려와서 나무 수천 그루가 뭉텅뭉텅 넘어지고 뿌리째 뽑히면 마치 내 자식들이 몸이 다쳐서 아파 드러누운 것처럼 안타깝습니다."

―제일 무서운 게 산불이라고요.

"서너 번 산불이 났어요. 1977년 2월 26일 첫 대형 산불이 났습니다. 마을 주민들이 논두렁을 태우다가 불길이 강풍을 타고 산으로 번졌습니다. 부랴부랴 초당림에 갔더니 관리소장이 달려와서 울더군요. '울지 마라. 걱정할 것 없다. 하나도 없었던 것으로 알고 다시 시작하자' 그런 식으로 해왔습니다."

"초당림 500년 이상 유지됐으면"

김기운은 고향 무안에 1980년 백제여상(현 백제고교)을 세웠다. 1994년 그의 나이 73세 때는 초당대학교를 설립했다. "주변에선 수도권이 아닌 지방에서 학교 경영이 정말 어렵다고 했지만 내 고향 무안이 아니면 안 된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나무는 어렸을 때 가지치기를 잘해줘야 고급 목재로 쓰일 수 있습니다. 사람도 똑같습니다. 어려서부터 잘 관리해야 합니다."

그는 또 백제여상에 핸드볼팀을 만들고 백제약품 계열사인 초당약품에도 실업팀(현재는 해체)을 만들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여자핸드볼 국가대표 선수 상당수와 감독이 초당약품 소속이었다.

인터뷰가 1시간가량 이어지자 김 명예회장 숨이 가빠졌다. "건강에 굉장히 주의했지만 이제 약으로 어떻게 해 볼 시기는 지났습니다. 다 정리했습니다. 백제약품은 큰아들(김동구 회장)이 맡아서 잘 경영하고 있습니다. 개인 재산은 복지재단에 거의 다 기부했고, 사는 집도 그렇게 될 겁니다. 다른 것은 다 부질없는 욕심인데…. 학교하고 산만은 계속 지켜보고 싶습니다."

―창업해서 회사를 이렇게 키웠는데 부질없다니요.

"전 세계적으로 봤을 때 200년, 300년 된 회사는 드뭅니다. 그런데 학교나 숲은 그보다 훨씬 오래된 곳이 많습니다. 500년도 되고, 1000년도 갈 수 있지요."

초당림은 일반인 입산이 제한된 숲이다. 산불 위험과 무단 채집으로 산이 망가질 것을 우려한 조치다. 그런데 2015년 강진군과 협의해 초당림 입구에 수영장이 생겼고 그때부터 여름 한 달간만 개방하고 있다. 지난달 23~ 24일에는 처음으로 숲 속 힐링 체험 행사가 열려 약 4000명이 숲을 찾았다. 김 명예회장은 "사람들이 숲을 보물로 생각하고 이를 잘 아껴서 후대에 전수하길 바란다"며 "내 남은 소원은 초당림이 500년 넘게 유지되는 것"이라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초당림을 걸어 내려오다 문득 뒤를 돌아봤다. 수령 40년이 넘는 어른 몸통만 한 굵기 나무들이 빼곡했다.


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7/07/201707070174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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